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공주문화원 특강서 밝혀

 

▲ 사진= 금강문화포럼 신용희 대표 조사로 밝혀진 공주 교동 산신제 ‘박문수 깃발’. 신용희 제공

 

 

‘박문수 깃발’이 충남 공주 교동에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랫동안 마을의 안녕과 평안, 풍년 등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비롯해 각종 마을행사에서 ‘박문수 깃발’을 사용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10월 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에 의해 어사 박문수(1691~1756)가 공주에 거주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박문수와 공주의 인연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조한필 원장은 24일 공주문화원 특강에서 그간 추가로 밝혀진 사실을 공개했다. ‘공주에 살았던 어사 박문수’ 특강에 따르면 공주 교동에서 오랫동안 산신제 및 마을 행사를 지내면서 사용하는 깃발을 ‘박문수 깃발’이라고 불렀다는 것. 이는 금강문화포럼 신용희 대표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주민들은 “박문수가 이 깃발을 처음 주민들에게 만들어 줬다고 전해져 온다“고 말한다.

박문수는 1720년대 교동(공주여중 인근)에 집을 처음 마련했다. 박문수는 1727년 영남별견어사로 임명되기 직전까지 2년 8개월 동안 공주에 살면서 주민들과 친숙하게 지냈음을 각종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사로 떠나기 전 당시 임금인 영조와 대화하면서 공주에서 보고 겪은 농민들 생활상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조 원장은 “소론 출신인 박문수는 1725년 노론이 집권하자 공주로 낙향해 농사도 지으면 살았다. 이 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돼 위민(爲民)관료로 자리 잡게 된 것 같다”면서 “이런 배경으로 당시 백성들이 암행어사 설화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주인공을 삼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고령 박씨 후손들은 적어도 170년 넘게 공주 교동집을 운영했다”고 말했다. 박문수의 아들, 손자, 증손 등의 호적문서에 모두 공주 노비가 기록돼 있다. 특히 박문수 6세손의 한성부(서울) 호적표를 보면 1894년 7월 공주에서 서울 회현동으로 이주한 것으로 돼 있다.

공주에는 박문수 후손들 외에 또 다른 고령 박씨들이 살고 있었다. 웅진동 ‘박산소’ 지명은 이들로부터 비롯됐다. 처음 이곳에 묻힌 이는 박문수의 작은할아버지 박진(1655~1700)이었다. 후손들은 공주 무릉동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세기 말 참판(종2품) 벼슬을 한 인물 2명이 이 문중(교관공파)에서 배출됐다. 후손들이 과거 합격 교지 및 관복을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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